등록일 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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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367번 빌딩 콘텐츠
  • 월미문화로1에서 ~ 월미문화로 90까지 빌딩 콘텐츠
  • #수익용 #재테크용 #개발호재
  • 등록일 24.03.28
  • 목적 빌딩 콘텐츠
  • 지역 인천 중구 북성동   월미문화로1 에서 ~ 월미문화로 90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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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月尾島, 영어Wolmido, Wolmi Island, Wolmido Island, Roze Island)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된 인천 앞바다의 육계도이다.

월미도는 면적이 0.7 km2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지만 제물포(지금의 인천항)가 항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월미도가 제물포 앞에 딱 버티고 서서,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제물포에 정박한 배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여진 기마병이 바람처럼 달려와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막아버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이 1656년(효종 7)에 제 2의 피난길을 개척할 때 기착지로서 월미도에 월미행궁이 지어지기도 했다.[2]:14-20

월미도를 지나지 않고서는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월미도는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외국 군대에게 점령되어 군사 요충지로 쓰이는 운명을 맞아야만 했다.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 사건 때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으러 인천에 접근한 이양선들이 입항 전 한 차례 머무르는 섬이었으며,[2]:30 ··가 조차 경쟁을 벌일 때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일제 해군의 석탄 창고가 설치되는 수모를 겪었다.[2]:126 러일 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 해전은 월미도 앞바다(월미해협)에서 벌어졌고, 일제가 승리하고 나서는 병참기지화되었다.[2]:152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소위 '조선 제일의 유원지'라는 명목으로 월미조탕을 비롯한 유원지, 숙박시설을 지어 부유한 자들에게만 호화로운 인공낙원을 제공하였다.[2]:163-174[3]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미군에게서 네이팜탄 폭격을 당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터 주게 되었다. 이 폭격으로 약 120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월미도민 100여 명과 월미도에 파견된 육지의 노무자 상당수가 죽었다.[2]:220-245 전쟁이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귀향하여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휴전 후에 미군부대가 계속 주둔해서, 미군 부대가 물러가자마자 바로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세워서, 국방부와 인천시가 도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민들은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배상과 귀향을 요구하였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월미도민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인천 바닷가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4]로 떠올랐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월미산에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설립된 데다가,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5][6]

지명 유래[편집]

어을미도(魚乙未島)[7], 어을미도(於乙味島)[8], 어미도(於味島)[9], 제물도(濟物島)[10], 돌도(突島)[11], 월성(月星)[12], 돌미도(突尾島) 등으로도 불렸다. 서남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북동쪽은 완만한 구릉이다. 흔히 ‘달 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도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얼다(어르다)'의 '얼'과 물(水)을 뜻하는 '미'가 합쳐져 '물이 섞이는(어르는, 휘감아 도는) 섬'이라는 '얼미도'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자로 음차하면서 '월미도'가 되었다.[13][14][15][12]

역사[편집]

조선 말까지는 효종 때 월미행궁이 지어졌다는 승정원일기 외에 역사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다.[7][3] 지도를 보아도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도 월미도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고, 대동여지도에 와서야 '월미'라는 표기에 '행궁'이라는 부기가 붙어 나온다.[16] 그러나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서울로 오는 배는 반드시 월미도 서쪽 바다, 월미해협을 거쳐가야 했기 때문에 월미도는 백제 때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역, 군사 요충지로 역할했을 것이다. 조선 때는 인천도호부 소속이었는데, 1653년(효종 4)에 영종진이 설치되면서 그에 편입되었다.[14]


월미도는 개발호재가 인천 0순위입니다.

고도제한 완화 추진중이며  건축 용적률을 급등할것으로 예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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